영화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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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왔다.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단종과 영월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배우 유해진이 연기한 엄흥도라는 인물은 나의 직계 조상님이어서 영화를 보기전부터 더 기대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께 조상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영화를 통해 다시 그분의 삶을 마주하게 되니 감명 깊게 와 닿았다.
영화에서 엄흥도는 촌장, 즉 지금의 마을 이장 정도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조상님은 오늘날의 면장에 가까운 지방 행정 책임자인 '호장'이셨다. 지방 관리로서 안정된 지위와 가족의 안위를 책임져야 했던 만큼,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본인의 목숨은 물론 가문의 존속까지 걸어야 했던 중대한 결단이었다. 당시 세조는 단종의 죽음 이후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내렸고, 모두가 두려움에 나설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상님께서는 결코 이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보다 인간의 도리를 더 크게 여기셨고, 차가운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직접 수습해 장례를 치르셨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단종의 시신을 강물 위에서 끌어안는 모습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신념을 지키려 했던 조상님의 숭고한 정신 그 자체로 느껴져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영화는 그 장면으로 끝을 맺었지만,그 이후의 삶은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시작이었다. 장례를 마친 후 조상님께서는 세조의 보복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피신하셨고, 그 과정에서 강원도를 떠나 경북과 울산 일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후손 일부가 울산 울주군 산성마을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곳은 영월 엄씨의 집성촌이 되었고, 산성마을에 정착했다 하여 ‘산성 엄씨’라고도 불렸다.
내가 자란 고향도 그 근처였다. 매년 아버지를 따라 산성마을 친척 어른들과 묘사(산소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러 가곤 했는데, 그때 산성마을 엄씨 어른들을 모두 ‘아재’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의 결혼 일화만 봐도 당시 우리 집안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자라셨지만,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아버지께 스물두 살의 나이로 시집을 오셨다. 내 기억 속의 외갓집은 아주 큰 기와집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를 시집보낼때 “산성 엄씨는 양반이고 근본 있는 집안이다”라며 어머니를 설득하셨다고 한다. 엄흥도 조상님의 의로운 선택이 수백 년이 흐른 뒤에도 가문의 명예로서 인정받는 토대가 된 셈이다. 지금은 가문을 따지는 사람이 없겠지만 과거에는 그것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한 사람의 선택이 당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 뒤 후손들의 삶과 자부심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상님께서는 고난이 닥칠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안정된 삶 대신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하셨다.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 당장의 이익보다는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보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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